近代舞踊(근대무용) 쉰 돌

1926년 3월 21일은 日本人舞踊家(일본인무용가) 石井 漠(석정 막)이 京城公會堂(경성공회당)에서 新舞踊(신무용)공연을 한 날이다. 우리 新舞踊(신무용) 50周年(주년)은 그 公演(공연)날로부터 起算(기산)된 것이다. 생각하면 日本人에 의하여 韓國近代的 舞踊(한국근대적 무용)이 시작되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開港(개항) 1백年. 甲午更張(갑오경장)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여도 歷史的 意義(역사적 의의)가 喪失(상실)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어찌 이뿐일까? 近代的 槪念(근대적 개념)과 연결되는 모든 우리의 歷史(역사)를 뒤져보자! 外國人先驗(외국인선험)자들의 이름이 羅列(나열)되어 있다. 우리 基督敎(기독교)는 으레 外國人宣敎師(외국인선교사) 來韓年代(내한연대)부터 시작되고 춤과 가장 가까운 우리 音樂80年史(음악80년사) 역시 美國 아펜셀라의 讚頌歌(찬송가)의 年代(연대)부터 계산된다. 또 거기에는 1900年 獨逸人(독일인) 엑켈트에 의해 우리 王朝(왕조)의 軍樂隊(군악대)가 創設(창설)되고 그래서 本格的(본격적)인 樂譜(악보)에 의한 音樂(음악)이 導入(도입)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우리 音樂(음악)에 무슨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舞踊家(무용가)나 敎授(교수)들은 이 새 思潮(사조), 新舞踊(신무용)이 外國人(외국인)부터라면 안되는 것처럼 지난 3월 7일字 한국일보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新舞踊年代(신무용연대) 50年(년)에도 異義(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未治(미치)하다는 것으로 事實(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初期西歐思想(초기서구사상)의 춤이 日本人에 의해 傳達(전달)되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까? 斷的(단적)으로 우리 舞踊社會(무용사회)의 閉鎖的(폐쇄적)이고 排他的 生理(배타적 생리)를 論證(논증)하는 것. 歷史(역사)는 承服(승복)일뿐 拒否(거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石井 漠(석정 막)말고 우리 사람으로 시작한 新舞踊(신무용)은 역시 이 石井 漠(석정 막)이 두 번째로 京城(경성)으로 온 1927年(년)10월 崔承喜(최승희)춤이다. 그때 崔는 세레나데라는 이름의 獨舞(독무)를 비롯하여 日本서 1年동안 배운 新舞踊(신무용) 여럿을 춤췄다. 이것이 우리 사람에 의한 新舞踊(신무용)의 紀元(기원)이다. 불쾌한 崔(최)의 思想(사상) 問題(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런 無意味(무의미)한 外形的(외형적) 사실만으로 우리 近代的 舞踊(근대적 무용)의 紀元(기원)을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정작 중요한 新舞踊 開眼(신무용 개안)의 精神的 背景(정신적 배경)은 완전히 날라가 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石井 漠(석정 막)의 新舞踊以前(신무용이전)에도 우리에게는 近代的 舞踊形態(근대적 무용형태)가 類似(유사)한 方法(방법)으로 紹介(소개)되어져 있었고 슬라브系(계)의 호빠끄춤도 익숙하여져 있어 어떠한 새로운 춤도 알아볼 만한 바탕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단순한 觀客(관객)이 아닌 舞子(무자)였던 當代의 춤 主役인 趙澤元(조택원)등이 新舞踊公演(신무용공연)날인 3월 21일밤 新舞踊洗禮(신무용세례)을 받고 그 춤으로 轉身(전신)하게 된다는 이런 새로운 춤定着(정착)의 根幹(근간)되는 대목이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藝術(예술)의 歷史(역사)는 때로는 한 作家(작가)나 藝術家(예술가)의 思想轉換紀錄(사상전환기록)이기도 하다. 피카소의 靑色時代(청색시대)니 쉔베르그의 無調時代(무조시대)니 하는 것도 모두 이런 轉身(전신)의 마디며, 그 마디에 붙인 呼稱(호칭)이다. 그렇다면 趙澤元(조택원)에게 있어서 그날밤은 舞者(무자)로서의 한 매디며 轉身(전신)의 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여도 石井 漠(석정 막)의 그 公演(공연)날 意味(의미)는 커진다. 이번 趙澤元翁(조택원옹)은 本誌(본지)와의 錄音對談(녹음대담)에서 올해를 자신의 新舞踊(신무용) 50周年(주년)임을 말한 사실도 여기 밝혀둔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그의 公式的(공식적)인 趙翁(조옹)의 춤記錄(기록)은 이것보다 3年은 더 거슬러 올라 1922年(년) 土月會(토월회) 第3回公演(제3회공연)의 劇中(극중) 춤場面(장면)에서 出演(출연)한 것부터 칠 수 있다. 黎明期(여명기)의 舞者(무자)로서의 位置(위치)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어떻든 우리가 新舞踊(신무용) 50年(년)을 기억하는 것은 近代舞踊精神(근대무용정신)의 意味(음미)를 되돌아보자는 것이지 石井 漠(석정 막)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월간춤 1976년 3월 창간호

조동화 趙東華(본지 발행인)

月刊 『춤』– 1976년 創刊

20263월호로 창간 50주년(통권 601호)을 맞는 춤 잡지는

1976년 춤의 ‘지성화화 기록화’ 의 기치로 창간, 문화 각계, 각분야의 지성인들을 필자로 독자로 춤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무용평론가를 배출하며 춤비평의 산실을 통해 당시 춤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을 문화 예술의 한 장르로 격상시켰으며 영화 연극 음악 뿐이었던 문예진흥기금의 무용분과, 대한민국무용제 창설 등 무용의 대사회적 위상을 강화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이어지는 ‘춤 정보’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공연소식과 무용평론의 꾸준한 번역 소개를 통해 우리 무용가들의 세계화와 정보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춤은 수천 무용인들을 한뜻으로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는 모금 운동을 발화시키면서 1996년 ‘춤의 선구자 조택원 춤비’ 를 국립극장 앞마당에 세우는데 성공하였고, 이어 2001년 ‘한국 전통춤의 집대성자 한성준 춤비’를 태평무 전수관에 세웠다. 이는 언론과 잡지의 힘을 극적이며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춤은 계몽적 문화운동 구심체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춤』誌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5개국 미만 나라에서 발간되는 적은 수의 무용 월간지의 하나로서, 한국무용계의 지표이자 한국 선진문화의 긍지로 작용하였으며,
『춤』誌는 상업적으로 척박한 무용계 환경에서 상업주의와 센세이셔널리즘과의 결탁 없이 50여 년간 한 번도 결호 없이 무용 전문지를 발간하였다.

『춤』은 전발행인 조동화 선생의 유지에 따라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행사 대신 창간호부터 50년간 발행해온 춤 600호(이른바 한국 현대춤의 역사) 600권 모두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상에 공개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은 물론 무용과 학생들과 무용학자들 이어서 우리 문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한다.

□ 월간 『춤』 50年 歷史

1966년
1972년
1976년3월 춤 창간 (명륜동) 표지 제자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77년문예진흥원(최창봉 사무총장) 문예진흥기금 무용분과 제언 창설
1977년6월호부터 표지 제자 변경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
1979년10월 1일 대한민국무용제 제정(참고 신동아 7909, 7912 문예진흥 7911)
1984년6월 100호
1986년3월호 춤 10주년
1987년무용평론가회 창립 (채희완 회장, 김채현 총무간사 지명 선임)
(회원 : 박용구 조동화 강이문 이순열 김영태 채희완 이상일 남정호 김태원 이종호 김채현)
9월 『무용저널』 창간호 발행
1988년춤지 이전 (명륜동→동숭동 사옥)
1988년무용평론가회, 명칭을 ‘한국무용평론가회’로 변경
1989년김영태 신임 회장, 김채현 총무간사 지명 선임
1992년10월 200호
1993년3월호(205호) ‘조판 사식’에서 ‘컴퓨터 사식’으로 변경
1996년3월호 춤 20주년
1996년조택원 춤비 제막(국립극장 앞마당)
* 준비기간 1991年 3月~1996年 4月 모금액 5천만 원, 모금 인원 1,300명
1996년문학의 해 ‘가장 문학적인 예술잡지’ 선정(한국문인협회)
1996년잡지의 날 ‘우수잡지’ 선정
1997년4월 정가 5,000원으로 인상(이전 3,500원)
1998년제1회 평론가가 뽑은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
1998년8월호 김경애 편집장 마지막 후기 (12년간 근무)
1999년1월호(275호)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변경
1999년7월호 조은경 편집장 부임
2001년2월호 300호
2001년한성준 춤비 제막(안성 태평무 전수관)
*준비기간 2000年 3月~2001年 4月. 모금액 4,700만 원, 모금 인원 1,070명
2001년춤 300호 기념 목차색인 작성 (66年 創刊號, 76年 3月號부터 2001年 2月號까지)
2005년
2006년3월호 춤 30주년 기념호 발간
2006년춤 30주년 자료 15만여점 연낙재 춤자료관(대표 성기숙) 기증
2008년태평무 인간문화재 강선영 사진집 편집 발간(연낙재 刊)
2009년6월 400호 발행인 변경 조유현 취임
2009년한국평론가회 분열, 한국춤비평가협회 결성
2014년4월 24일 창간 발행인 조동화 선생 별세
2016년3월호 춤 40주년
2017년10월 500호 발행,
기념 단행본 『춤이 있는 풍경』 발행
2019년우수콘텐츠잡지 선정(한국잡지협회)
2021년11월22일 전상애 선생 별세
2022년우수콘텐츠잡지 선정(한국잡지협회)
2022년
2022년7월 춤지 이전 (동숭동→김상옥로66번지 3층(충신동)
2024년4월 23일 「조동화 10주기 특별세미나 : 한국춤 지성화를 이끈 선구자 조동화 선생을 말한다」
2025년3월 춤지 이전 (김상옥로→종로35길 44번지 2층(효제동)
2026년3월호 춤 50주년

□ 월간 춤 정가 변동

1976년3월 350원 / 1년 정기구독 3,500원
197706 500원 / 5,000원
197812 700원 / 7,000원
197905 1000 / 10,000원
198103 1300 / 12,000원
198204 1500 / 18,000원
198603 1800 / 21,600원
198705 2200 / 26,400원
198907 2600 / 31,200원
199303 3500 / 42,000원
199704 5000 / 60,000원
202501 8000 / 96,000원

□ 월간 춤

주소 (03126) 서울시 종로구 종로35길 44, 2층
전화 (02)762-3595, 743-7784 Fax (02)743-7078
email: choom@choom.co.kr
HP: www.choom.co.kr

□ 구독 문의전화 (02)743-7784

정가 8,000원 / 1년 정기구독 96,000원(일본 14만 원, 미주 유럽 16만 원)
구독료 계좌번호(신한) 110-031-281842(조유현)